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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나이 프로필 결혼 이모 한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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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김완선은 1969년 5월 16일생으로 올해 나이 54세 입니다. 고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출생이며 키 163cm, 몸무게 45kg, 혈액형 B형이라고 합니다. 학력사항은 서울잠원초등학교, 세화여자중학교, 세화여자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검정고시), 하와이대학교 디지털아트학과 졸업이며 가족은 부모님과 5녀 중 셋째라고 합니다. 현재 소속사는 KW선플라워 소속입니다.

데뷔 활동

김완선은 가수 인순이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를 통해 1983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으며 1986년 1집 앨범 '오늘밤'으로 가수 데뷔를 하였습니다. 김완선은 데뷔와 동시에 단번에 인기 가수로 자리를 잡았고, 최초이자 최고의 여성 아이돌 댄스 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에 섹시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기 전에 섹시 컨셉으로 활동한 가수이기도 합니다. 데뷔 당시 나이는 겨우 만 17세였다고 하네요.

당시에는 드물었던 댄스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완선은 3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뛰어난 춤 실력은 물론 퍼포먼스와 의상, 표정 연기 등으로 김완선을 두고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처음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2집 ‘나 홀로 뜰 앞에서’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이어갔으며 1988년에는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2집 음반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발표해 꾸준한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199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김완선은 이후로도 5집 앨범은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까지 연달아 히트하면서 100만 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큰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런데 1992년 6집 활동 중 김완선은 자신이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었던 MBC ‘특종 TV 연예’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해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김완선은 동아시아에서 활동을 펼쳤고, 1996년 10월 7집 '이노센스'를 발매하며 컴백했고 복귀와 공백이 반복되었던 2000년대를 보낸 후 2011년 'EP Super Love'를 발매하여 가요계로 컴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김완선은 1992년 은퇴 선언에 대해 당시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가 기획했던 연출이라고 밝혀 놀라움을 주었는데요. 이모 한백희의 꿈은 김완선을 아시아의 스타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홍콩 진출을 염두에 두고 쇼킹한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 신문사 기자와 상의를 거쳐 은퇴 발표를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김완선은 너무 창피하고 힘들었다고 하며 방송 프로그램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슬퍼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해 괴로워서 운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은퇴 선언 후 김완선은 1993년 말 당시 최고의 인기 중국 배우 겸 가수 알란 탐과 함께 듀엣곡을 발표하였고, 1년 뒤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을 하려 했지만 팬들의 마음을 돌아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김완선은 2014년 국제대학교 K-POP 스타와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오디션 튜토리얼 과목을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채널 A의 건강 정보 프로그램 TV 주치의 닥터 지바로의 MC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후 SBS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 고정 패널로 출연하여 활약해 SBS 연예대상에서 김광규와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간간이 공연과 콘서트를 열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모 한백희

김완선이 활동 할 당시 시대를 앞서간 이모 한백희의 스타 육성법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연습생을 할 당시 이모의 집에서 하루 종일 연습만 했다고 하며 무려 7년이나 감금이 되어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김완선은 스파르타식으로 관리를 받으며 중학교를 그만두고 거의 3년 동안 이모 한백희가 살던 곳에서 고립되어 데뷔 준비를 하였고, 당시 한백희는 길거리 댄서, 무용수들에게 연습실을 무료로 내어주는 대신 김완선을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김완선은 스트릿 댄스는 물론, 발레,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들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철저한 이모의 계산대로 성장을 한 김완선은 이모를 의지하며 가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김완선의 3집 활동이 시작 될 당시 스무살이 되면서 자아가 생기기 시작해 점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모 한백희는 김완선을 억누르기 시작했고, 곡 선정부터 무대의상, 메이크업, 인터뷰 대화까지 전부 시키는 대로 했었다고 하는데요. 김완선은 데뷔 후 함께 활동했던 가수들과 대화 한 번 못 해봤을 정도로 이모의 간섭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 완벽한 무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전략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김완선은 수입 정산 문제로 이모 한백희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이모와 함께 활동하던 13년 동안 단 한번도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하며 김완선의 전성기 때 한 달 수입이 아파트 2~3채를 살 정도였으나 이모와 계약서도 쓰지 않고 13년 동안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이모부가 사업을 하다 14억원의 부도를 내면서 김완선이 13년 동안 번 돈이 모두 이모부의 빚을 갚는데 쓰였고, 김완선은 이모가 차라리 그 돈을 본인에게 썼더라면 덜 억울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완선은 1996년 한국에서 컴백하여 선언 7집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결국 이모 한백희와 1998년 결별을 하면서 4년 정도 김완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완선은 이모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못했다고 하는데요. 2006년 이모 한백희가 당뇨병으로 응급실에 갈 돈이 없어서 김완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김완선은 이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한백희는 지난 2006년 신장병과 당뇨 합병증으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고,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용서를 하지도 못한채 끝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완선은 이후 이런 사실들을 세상에 알린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모와의 일을 말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밝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혼 남자친구

김완선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며 현재 남자친구 유무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완선은 한 방송을 통해 비혼주의자임을 당당히 공개하기도 했으며 가장 잘한것이 결혼 안한것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완선은 결혼이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만약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 같다며 결혼을 했으면  다른 사람 인생을 불행하게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현재 솔로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라고 하며 김완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보다는 '본인의 자유'라고 당당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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