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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1987 줄거리 결말 실화 6.10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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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장르 : 드라마

감독 : 장준환

출연 :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개봉 : 2017.12.27.

 


영화 ‘1987’ 줄거리 결말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왜 그렇게 다들 잘났어!”

 

1987년 1월 14일.

 

빠른 속도로 달리는 구급대 한 대.

구급차의 목적지는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그곳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쓰러져 있고, 그를 살려내려 긴박하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경찰 조사를 받다가 고문치사로 인해 끝내 22살 나이로 사망하게 된 박종철.

 

경찰 측은 이를 덮기 위해 단순 쇼크사로 몰고 가려하고, 박 처장(김윤석)의 직속 부하들은 당시 검사였던 최 검사(하정우)에게 바로 시신을 화장할 것을 요구하며 승인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죠.

 

하지만 최 검사(하정우)는 정의감이 큰 검사로 내용을 훑어보고는 사망한 지 8시간도 채 안된 22살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에 관련하여 화장 승인은 할 수 없으며 내일 부검을 통한 죽음의 사인을 확인 한 뒤, 승인을 해주겠다고 거절하며 자리를 벗어납니다.

 

사건을 취재하던 윤상삼 기자(이희준) 또한 죽은 지 8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부검을 고사하고,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화장부터 하겠다는 점에 이상함을 느끼고, 박종철의 심폐 소생을 맡았던 담당 의사를 만나 집요하게 물어본 끝에 물고문 중 질식사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보도하게 됩니다.

 

중앙일보의 기사로 인해 이 사건으로 사회에 큰 파문이 일자 안기부와 치안 본부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게 됩니다.

 

기자회견에서 박 처장은

"겁을 먹은 학생의 앞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발표를 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파문이 커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조한경 등 경찰 2명이 박종철 군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축소, 은폐하여 보도하게 됩니다.

 

한편, 교도관인 한병용(유해진)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조반장(박희순)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짜 범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대학에 합격한 그의 조카 연희(김태리)에게 마이마이를 선물로 건네주며 절에 있는 민주화 운동의 조율사 김정남(설경구) 과의 접촉을 부탁합니다.

 

연희 아버지는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가 희생당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으며 연희는 이를 내켜하지 않죠.

 

어느 날, 삼촌이 남영동에 끌려가게 되고, 연희는 삼촌을 위해서라도 세상에 진실을 알리기로 결심하게 되어 사찰에 있는 김정남을 만나 삼촌이 남긴 자료를 넘기게 됩니다.

 

옥중 서신 전달로 천주교 정의 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사실로 밝혀지고, 축소, 은폐되었던 박종철 고문 사건에 가담된 경찰이 2명이 아닌 5명이었다는 사건의 진실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의 내막이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6월 항쟁'을 일으키죠.

 

이러한 상황 속 연희가 백골 단원에게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려던 찰나 마스크를 쓴 남자가 튀어나와 연희를 데리고 샛길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이한열(강동원)이었습니다.

 

이후 연희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그 남학생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고, 큰 충격을 받아 시청광장으로 달려 나갑니다.

 

연희는 버스 위에 올라 시위하는 시민들로 가득한 전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외칩니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

 

영화 ‘1987’ 속
6.10 민주항쟁(6월 항쟁)

 

6.10 민주항쟁 발생 배경

 

1987년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의 사망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민주 항쟁이 전국적인 시위로 확대되었습니다.

 

▶4.13 호헌 조치

4월 13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박종철 열사

(1964. 4. 1 ~ 1987. 1. 14)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박종철 열사는 수배 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고,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습니다.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던 경찰은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자,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를 인정하며 정정 발표하였습니다.

 

▶이한열 열사

(1966. 8. 29 ~ 1987. 7.5)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는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쐈고,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은 이한열 열사는 27일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1987년 7월 5일 끝내 세상을 떠납니다.

 

6.10 민주항쟁

 

6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전개된 명동성당 농성투쟁, 18일 최루탄 추방 대회, 26일 민주헌법 쟁취 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에서 연인원 5백여만 명이 참여하여 '직선제 개헌 민주화 촉구'를 위한 거리집회·시위·농성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참가하여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어요.

 

6.10 민주항쟁의 결과 및 의의

 

국민 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자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의 '6·29 선언'이라는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시행하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새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정권 교체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죠.

 

하지만 6.10 민주 항쟁은 시민 저항을 통해 전두환 정부의 장기 집권 의도를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는 의미가 있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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