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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박술녀 나이 남편 이원세 자녀 프로필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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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술녀

박술녀는 1957년생으로 올해 나이 66세입니다. 고향은 충청남도 서천군 출생이며 직업 한복 연구가, 디자이너입니다. 가족은 남편 이원세와 아들, 딸이 있습니다. 학력은 장선초등학,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복식 과정 5기, 8기 수료입니다. 소속 박술녀 한복으로 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과거 집안 가족

박술녀는 과거 너무나도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하는데요. 박술녀의 외할머니는 아기 때 강아지가 눈을 핥은 후로 앞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하며 가난과 사투하며 씨받이로 다른 집에 가게 되었지만 딸만 둘을 낳아 쫓겨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박술녀의 어머니 역시 가난 때문에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동생을 엎고 서당 앞에서 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삶의 이치와 지혜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가난으로 고생하던 외할머니는 손녀의 이름을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박술녀라고 지어주셨다고 하는데요. 박술녀는 '열 두 대문을 달고 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박술녀의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쉽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박술녀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하루 세 끼를 먹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술녀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배가 고픈 환경에서 다른 집에 식모로 가기도 했으며 그러다 보니 결국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유일한 학창 시절인 초등학교 시절조차 자신의 가난한 형편 때문에 틈만 나면 학교에 결석했다고 합니다. 당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혼날 것이 두려웠던 박술녀는 가난 때문에 의기소침해져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비가 오면 비가 온다는 온갖 이유로 학교를 결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친척 결혼식에 갈 때면 꼭 한복을 입었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박술녀는 한복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박술녀는 어려웠던 잡안 형편 속, 밑에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천안의 방직 공장 여공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26살 때 한복의 전설이라는 이리자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한복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술녀 어머니는 전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한복을 배우길 권했다고 하며 박술녀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고 하네요.

활동 경력

박술녀는 이리자 선생으로부터 배우면서 하루에 잠을 4시간만 자고, 팔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바느질을 하면서 한복에 매달렸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일에 미쳐서 살았던 박술녀는 5년 만에 독립하며 자신의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술녀는 갑상샘암에 걸린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일을 쉬지 않고 했었다고 하는데요. 병원에 있을 때도 거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상생암 수술을 하면 목에 구멍을 내서 호스를 꼽아 이물질 통을 달게 되는데요. 박술녀는 스카프를 매고 다녔다고 하며 그 이후에 나름대로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하네요.

일에 열중하며 차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술녀는 이영희, 이리자, 박선영, 황신엽 등 1세대 한복 디자이너들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한복 디자이너이자 연구가가 되었고, 처음 군자동에 냈던 한복집을 강남으로 진출시켰는데요.

이후 수많은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명품 한복 디자이너로 자리매김 했으며 박술녀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주요 패션쇼에도 많이 참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웨딩 컨설팅이 나타나면서 신혼부부들이 웨딩 컨설팅 쪽에 카드 한 장만 주고 플래너들에게 준비를 시키게 되었는데 박술녀는 그쪽과 계약을 하지 않았고,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경제적 손실이 왔고, 어쩔 수 없이 집을 팔아 가게 운영비로 썼다고 합니다.

박술녀는 현재 박술녀한복의 원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결혼 남편 이원세 자녀

박술녀는 지금의 남편 이원세를 만나 결혼을 하였는데요. 박술녀 남편 이원세는 1953년생으로 올해 나이 70세이며 박술녀와 4살 나이 차이가 납니다.

박술녀는 남편 이원세와 맞선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남편 이원세의 원래 직업은 결혼 당시 체신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직장에 잘생긴 외모와 좋은 성격까지 갖춰 뭐 하나 빠질 것이 없었던 1등 신랑감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박술녀는 현재와 같은 명성이 없었던 평범한 처녀였으며 체격도 건장하고 덩치도 큰 여장부 스타일이기 때문에 남자들로부터 호감을 얻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박술녀는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남편을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인 구애를 했고, 결국 남편도 이에 넘어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3개월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박술녀는 27번의 맞선 끝에 남편 이원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하며 박술녀가 애걸복걸하며 결혼하자고 애원하고 매달렸다고 하네요.

박술녀와 남편 이원세는 결혼 후 아들과 딸 한 명씩을 낳았으며 박술녀는 결혼 후에도 남편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박술녀의 딸은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보고 팬과 연예인 사이보다 심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술녀는 출산을 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한복집이 유명해지면서 차츰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요. 과거 한복가게를 작게 할 때는 남편 역시 아내가 하는 일을 그냥 부업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박술녀의 한복이 차츰 알려지게 되면서, 박술녀는 남편을 설득해서 자기 대신에 집안일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박술녀는 아이들이 어릴 때도 나와서 일을 해야 했고, 남의 손을 타기 싫었기에 남편 이원세가 이를 대신했다고 하는데요. 남편 이원세 역시 깊이 고민하다가 당시까지 20년을 해오던 체신부 공무원을 그만두고 결국 박술녀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돌보고 육아에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공무원 생활보다 아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술녀는 늘 자신의 뒤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고 하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같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네요.

이런 박술녀 부부에게도 이혼의 위기는 있었다고 하는데요. 키우던 개의 식사를 제때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한꺼번에 개밥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남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남편이 이혼하자고 해 결국 법원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혼 도장을 찍기 전 남편에게 도장을 챙겨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가까스로 이혼할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박술녀 부부는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아들과 딸 모두 잘 자라 현재 딸은 독일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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