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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패티김 나이 딸 남편 프로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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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패티김의 본명은 김혜자이며 1938년 2월 28일생으로 올해 나이 85세입니다. 고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출생이며 키 168cm, 혈액형 B형입니다. 가족은 남편 아르만도 게디니, 딸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 카밀라 게디니가 있으며 학력은 중앙여자고등학교입니다. 종교는 개신교이며 소속사는 PK 프로덕션입니다.

 

과거 집안

패티김은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고 하는데요. 패티김의 어머니는 숙명여전을 3년 다니신 엘리트였고,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셨다고 합니다. 

패티김은 어릴 적 꿈이 자꾸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13살때 까지만해도 선생님,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고등학생 때는 결혼 얘기가 나오면 외국을 많이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외교관과 결혼하는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패티김은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국악을 배우게 되었으며 음악 기초 지식을 단단히 쌓았다고 하는데요. 그때 목청이 트였고, 고음처리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전국 국악 콩쿨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1956년 김혜자라는 본명으로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기생이 된다."라며 반대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악을 포기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패티김은 처음에는 가수가 될 생각이 없었고,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서 명동에 취직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음악을 좋아하던 오빠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오빠 친구 소개로 미8군 클럽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처음 6개월은 견습생활 기간을 거쳤고, 1958년 정식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데뷔 활동

패티김은 1958년 미 8군 무대를 통해 가수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패티라는 예명은 미8군에서 노래하던 시절 미국 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미국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패티김은 본명 김혜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패티김은 1960년까지 주로 주한미국 클럽을 다녔고, 이후 동남아시아 해외 공연을 다니게 되었는데요. 또한 일본 정부에 의해 직접 초청을 받게 되면서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하였고, 김시스터즈이후 한국가수 2번째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패티김은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을 하는 등 한국 현대 대중가요사에서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패티김은 초우,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별,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 못잊어, 살짜기 옵서예, 그대없이 못살아, 사월이 가면 등의 곡을 남겼습니다.

패티김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오랜 가수 활동을 해오는 동안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였는데요. 패티김은 건강 관리를 위해 매일매일 5km씩 걷기 운동과 요가를 비롯해 수영 1500m, 철저한 식이요법으로 전성기 때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패티김은 지난 2012년 2월 공식 은퇴 선언을 하였는데요. 건강 문제로 은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으며 패티김은 "석양이 온 세상을 붉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처럼 멋진 모습으로 여러분의 기억에 남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패티김은 은퇴 선언 10년 만인 2022년 KBS ‘불후의 명곡’을 통해 방송 무대에 올랐으며 최근 다시 한번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전남편 길옥윤 이혼 사유

패티김은 1966년 작곡가 길옥윤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길옥윤은 1927년 2월 22일생으로 패티김보다 11살 연상이며 1946년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섹소포니스트로 데뷔해 작곡가 겸 재즈연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었던 패티김은 국제 결혼을 꿈꿨으며 당연히 외국남자와 결혼할 줄 알았다고 하는데요. 미국 영화에 나오는 가정 생활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직접 생활해보니 언어나 습관, 사고방식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된장과 김치찌개를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만 해도 국외에서 활동하는 가수나 작곡가가 많지 않아 당시 미국 등 국외에서 활동하던 패티김과 일본에서 이름을 날렸던 작곡가 길옥윤은 많은 화제가 되었는데요. 패티김과 길옥윤은 가수와 작곡가로 음악적으로 환상적인 한 팀이었다고 하며 1966년 같은 무대에 자주 서며 가까워져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패티김과 길옥윤 두 사람은 1966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결혼 당시 당대 최고의 가수와 작곡가의 만남이었기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1968년 11월 13일 딸 최정아를 낳았지만 결혼 5년 만인 1972년 두 사람은 이혼 소식을 전하였는데요.

패티김은 길옥윤과의 이혼 사유에 대해 “서로 너무 몰랐던 것이 결혼 실패 원인이었던 것 같다. 365일 술을 마시며 도박까지 했다. 부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길옥윤은 이혼 후 혜은이를 발굴해서 당신은 모르실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제 3한강교, 새벽비 등 주옥같은 곡을 만들어 엄청난 명성을 누렸는데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음악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길옥윤은 28살 연하인 전연란과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이후 말년에 일본으로 도피생활을 해야했고, 건강이 안좋아져 결국 폐암과 척추암으로 투병하다가 1995년 3월 17일 향년 6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혼 남편 아바라도 게디니
자녀 딸

패티김은 1972년 이혼 후 1976년 이탈리아 계 미국인 아바라도 게디니와 재혼을 하였습니다. 패티김 남편 아라바도 게니디는 패티김보다 3살 연상이며 직업은 미국에서 무역업을 크게 하는 사업가라고 합니다. 

남편 아라바도 게니디는 패티김의 팬이었다고 하며 패티김과 연애를 하는 50일간 매일 100송이 장미를 보냈다고 하는데요. 이후 남편 아라바도 게니디는 패티김에게 청혼할 때 "아이를 낳아주면 아이 몸무게 만한 보석을 선물하겠다."라고 했는데 이후 딸이 태어나고 7.5캐럿 사파이어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패티김은 1978년 12월 30일 둘째딸 카밀라 게디니를 낳아 슬하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딸 카밀라 게다니는 UCLA에서 음악을 전공하여 아마추어 록밴드 보컬과 아카펠라 그룹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후 1999년 2월 패티김의 데뷔 40주년 공연무대와 이후 전국 투어를 따라다니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딸 카밀라 게디니는 2003년 가수로 정식 데뷔해 활동하였지만 1집 발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웨딩플래너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패티김의 첫째 딸 최정아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는 유엔난민고등판무간실(UNHCR)에서 근무하며 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며 세계를 떠돌기도 했는데요. 이후 2003년 함께 난민구호활동을 하던 영국인 윌리엄스와 결혼했으며 유엔난민기구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로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최정아는 이혼 후 패티김과 함께 살았으며 새아버지 아르만도에게 진심어린 효도를 다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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